영국의 지방 소도시 대학교에서 교수를 하며 격년 여름 마다 한국으로 휴가를 오는 절친 S군을 되돌려 보내야하는 이틀 전 저녁, Y군, L양까지 고등학교 동창 4인이 모였다. 우리는 교대의 양갈비집 고메램에서 프렌치랙, 등심, 숄더랙 구이 3종에 S군이 휴가 기간 체류하는 부모님 댁에서 들고온 게 분명한 리오하 뗌쁘라니요와 끄리안사를 차례로 비웠다. 외국인 아내와 소위 다문화 자녀 둘을 둔 그는 한국 역사를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에 저녁 모임 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방문했고, 나는 아마도 영국에 가져가려고 산 작은 기념품 태극기와 함께 하루 종일 레드 와인 2병을 백팩에 메고 쨍그랑거리며 돌아다닌 그의 우직함에 감탄했다. 2차로 인근 이자카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나이에 걸맞게 쇠락해가는 신체, 한국의 자녀 교육 문제, 부모님 건강에 대한 걱정, 좋은 남자와 오래 교제중이지만 결혼에 큰 뜻은 없는 L양과 의견을 나누며 서울 번화가에서 제대로 된 하이볼을 맛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하나로 뜻을 모았다. 다음날 오전 수업이 있는 L양을 아쉬움 어린 포옹과 함께 먼저 떠나보내고 남은 남자 셋은 소주를 마시러 반포대로에 위치한 24시간 국밥집에 갔다. 시니컬한 회계사 Y군은 오랜 타지 생활로 한국 사회에 대한 감을 상실하고 낭만적인 접근을 보이는 S군의 발언에 ‘이 강남 좌파 자식’ 이라며 우정 어린 꾸짖음을 이어갔다. 나는 S군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그는 강남 좌파가 맞다. 굴지의 건설 회사 사장을 역임하신 그의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1학년 비오는 여름날 S군과 같이 조퇴를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워커힐 호텔의 힐탑 피제리아로 우리를 데려가 피자를 사먹이신 어머님을 떠올려보면 맞는 거 같다. 아무튼 얼마전 광복절 특별사면과 복권을 받은 유력 정치인에 대한 무고함과 죄있음에 대해 서로의 이견을 확인하고, 이방인 아내와 두 딸의 거취는 한참 고민해 봐야겠지만 장래에 은퇴하고 한국에서 셋이 국밥이나 먹으러 다니자고 다짐하고 새벽 2시쯤 각자 택시 타고 귀가했다.

그렇게 믿었다. 굴지의 대기업 건설사 사장으로 은퇴하신, S군의 그 아버님 전화를 아침 6시에 받기 전까지는. 우리가 언제 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S군이 아직 집에 안 돌아왔다, Y군은 전화를 안 받는데 S군이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아는지 아버님은 존댓말로 차분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물어보셨다. 그 정중함에 압도되어 이 황망한 상황에 화들짝 놀라 잠이 달아난 나는 간밤의 타임라임을 복기하며,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먹고 놀았는지 시간 단위 행적을 소상히 아뢰었다. 마치 큰 실수를 저지른 고등학생이 주눅들어 부모님께 자신의 비행을 고하는 기분을 곱씹으며. 집에 가는 택시 호출에 어려움이 있어 길 건너편에서 다시 시도하려고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빨간불 와중에 성큼성큼 앞장 서 길을 건너는 S군의 모습, 간신히 잡은 택시가 도착하기를 앱으로 확인하며 기다리는 나를 위해 큰 찻길 중간까지 나가 애먼 승용차들을 휘청거리며 불러 세우는 그를 인도로 끌고 온 장면이 스쳐 지나가 너무 걱정스러웠다. 이 녀석을 먼저 집에 데려다줄걸 후회가 몰려왔다. 부디 내가 떠나고 쏟아지기 시작한 소나기를 피하러 들어간 곳에서 얌전히 잠들어 있기를 기도했다.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하고 주변 병원 응급실에 사고 환자가 있는지 확인하며 초조하게 기다리기를 3시간, 그 사이 일어난 시니컬한 Y군에게 온 다섯글자 메시지 ‘들어갔댄다’ S군이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음을, 괴한에게 납치되지 않았음을 감사했다. 그리고 40대 중반을 바라보는 그가 부모님과 아내에게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크게 혼나지 않길 빌었다. 그의 은퇴 후 한국 복귀 계획은 이만큼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