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utation (2020)

어느새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이 날을 매일 생각하기 위해 휴대전화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 사용하는 중요한 비밀번호 중 하나로 설정했지만, 당시 겪었던 일을 나의 글자들로 애도하는데 번번히 실패했기에 그날은 여전히 절대 잊을 수 없는 생경한 풍경으로 내게 다가온다. 어쩌면 물감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얼룩덜룩 덧칠한 서투른 그림으로 끝마칠까 두려워 차라리 그 기억이 자연스럽게 바스라져 앙상해지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죽음을 생생하게 다시 떠올려서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은 나에겐 너무 고통스러운 시도이고, 풀기 곤란한 매듭처럼 단단히 고정된 사건으로 마무리 짓는 행위라고 느껴져 애처로운 내 미련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그분의 목소리와 말씨를 또렷이 들을 수 있고, 언제나 내 손을 힘있게 쥐어주던 마르고 길쭉한 손가락의 딱딱한 감촉을 잊을 수 없다. 사랑하는 외할머니의 부재에 대한 자각이 비현실적이고 못 마땅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숨을 고르며 최선의 용기와 성실한 회상의 힘을 빌어 다른 날들과 다를 바 없었을 하룻밤 사이의 시간들을 내 안에 되살려 놓지 않으면 앞으로 나는 다른 어떤 글도 제대로 쓸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고, 계속 덮어두기에는 내 삶에 주변 정리가 필요한 이야기들이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고 있다.

여느 금요일 밤이었다. 일주일치 노동에 엉겨붙은 불쾌와 짜증들이 주말의 너그러운 기운 앞에 무기력하게 자취를 감추는, 아직은 쌀쌀한 이른 봄 밤이었다. 내가 살던 세곡동 집은 동교동에 위치한 직장에서 티맵 최적경로로 28km 정도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 한강을 건너 서울의 북서와 남동 귀퉁이를 지루하게 잇는, 상상만으로 한숨부터 나오는 통근길이다. 송현재라는 옛날 사람 같은 이름이 붙은 나의 거처는 부모님께서 몇 년 전 의욕적으로 재건축한 다가구 주택으로 1층 우리 옆집은 집주인 댁이고, 2층에는 동생 부부가 살며, 입주한 전체 여섯 가구의 절반을 최씨 일가가 점유중인 일종의 소규모 집성촌이었다.

금요일 저녁의 흔한 교통 정체를 비켜 가고자 늦은 대학원 수업을 끝낸 아내와 밖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느긋하게 출발해 밤 9시 무렵 집에 도착했다. 귀가 신고 겸 밤문안 인사를 드리러 부모님 댁을 먼저 찾았다. 두 분은 한국과 볼리비아의 축구 국가대표 A매치 평가전을 보고 계셨다. 경기는 0:0 하프타임 상태였고, 부모님의 맥 빠진 얼굴을 살펴볼 때 긴장감 없는 심심한 내용으로 진행된 전반전이었을 걸로 짐작했다. 작은 방에서는 할머니가 평화롭게 주무시고 계셨다.

2017년 부활절을 앞둔 고난주간 어느 새벽에 처음으로 삼성병원 응급실에 실려 간 할머니는 곧바로 큰 수술을 받은 후 중환자실과 일반병동, 다시 응급실을 전전하며 눈에 띄게 쇠락해 갔다.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는 의정부의 한 요양병원에 오래 계셨는데 몇 차례의 주말 병문안을 통해 내가 받은 요양기관에 대한 씁쓸한 인상은 아주 냉정하게 말해 젊음과 건강을 숭배하는 이 사회가 병들고 장애가 있거나 어쩔 도리 없이 늙어 한물 간 구성원들에게 최소한의 의료적인 지원을 제공하며 위화감과 부채의식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형 병원에 비해 평균 연령이 높은 간호사들과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말 사이에만 존재하는 유니콘 같은 주치의, 긴 대화가 어려운 중국 동포 간병인들이 몸을 가누기 어려운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때론 사무적인 태도로 돌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와 서글픈 무력감이 밀려오곤 했다.

이러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어색하게 가라앉은 정서가 전염력이 더 높기 마련인지 요양원을 다녀온 날은 나도 동생도 엄마도 나른한 일요일 오후가 품고 있는 무상한 우울감에 쉽게 젖어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할머니 당신께서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하셨다. 왜 자신이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어서 참담한 심정이셨고, 그런 노모의 마음을 공감하지만 하릴 없이 고개를 떨구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엄마는 결국 무리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할머니를 송현재에게 모셔와 자가 간병을 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만약 운명이란게 있다면 우리 가족이 빚어낸 인륜에 하늘이 반응한 일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데 할머니는 일주일이 채 지나기 전에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익숙한 냄새의 습기를 머금은 벽지로 둘러싸인, 뒷동산 뻐꾸기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오던 창이 달린 당신의 작은 방에서 편안히 주무시다가 소천하셨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하프타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곤히 주무시는 할머니를 깨우기 조심스러워서 하루 동안 안녕하셨는지 엄마에게 물었다. 낮에는 전문 간호사의 방문 치료를 받지만 성에 안 차는지 엄마가 퇴근하고 돌아오기만 손 꼽아 기다리다 딸이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성희야” 부르며 수다스레 요구하시는 할머니의 병시중 등쌀은 아주 대단했다. 노모의 뻣뻣한 팔다리를 쉴 새 없이 주무르고, 미음과 물을 먹여 드리기 위해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다시 눕히고, 야윌대로 야윈 환자의 몸이 배길새라 주기적으로 자세를 고쳐주기를 몇 시간 반복하니 이제 겨우 잠에 드셨다고 하신다. 어두운 방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할머니의 낮은 숨소리를 멀리서 확인한 나는 안심한 채 부모님께 작별을 고하고 내 집으로 물러났다. 이번 한주도 그럭저럭 마쳤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고달픈 나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아일레이 싱글몰트 위스키 아드벡 십년에 캐나다 드라이 토닉 워터를 섞은 비정통 하이볼을 한 잔 걸쳤다. 노곤해진 나는 샤워를 마치고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잠든지 2시간쯤 지났을까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것 같다. 옷 잘 챙겨입고 넘어 오거라.”

지난 2년간 궁극적으로 피하고 싶던 단 하나의 소식이자 그렇게 계속 연기될수록 더욱 강렬하게 의식하게 되는 파국적인 기별이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꿈결에 받아 든 부고에 애통함이나 충격 같은 감정적인 반응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오히려 놀란 사람은 세상 모르게 옆에서 자고 있던 아내였다.

“아… 그래요. 바로 갈게요.”

나는 짧고 담담하게 답하고 옷을 갈아 입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는 다급한 상황일수록 주어진 일들을 가능한 한 품위있게 해내기 위해 상상력과 기억력을 차분하게 발휘하는 편이다. 할머니와 직접 대면하는 마지막 기회인데 나로서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쑥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회색 울 멜랑쥬 바지에 검정 마르지엘라 셔츠, 그 위에 남색 드롭드 숄더 스웨터를 주섬주섬 찾아 입었다.

옆집으로 넘어가니 2시간 전에는 어둠에 잠겨 있어 먼 발치에서 바라본 할머니 침실 조명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불편한 할머니의 거동을 돕기 위해 바로 하루 전 들여놓은 환자용 전동 침대 위에 그녀는 다소곳이 누워 계셨다. 눈은 반쯤 열린 채 입은 살짝 벌어져 있었다. 침대 옆 바닥에 엄마가 주저 앉아서 할머니 가슴 위에 얼굴을 묻고 울먹이며 할머니께 말을 걸고 계셨다. “엄마… 자는 거야? 일어나 숨 좀 쉬어봐.”

“엄마아아… 흐으윽… 엄마 어서 일어나 봐.”

혹시나 호흡이 아주 느려져서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건 아닌지 엄마는 할머니 가슴에 귀를 대었다가 코와 입 주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놓고 잠식해오는 절망감과 싸우고 계셨다. 아버지는 누운 자세의 할머니 허리 밑으로 손을 쑥 집어 넣고 몸이 아래로 축 늘어졌는지 확인하셨다.

“사람이 죽으면 허리를 지탱할 힘이 빠져나가서 몸이 가라 앉는 거야.”

할머니의 눈을 완전히 감겨 드리며, 듣고 보니 그럴 듯하지만 살면서 내가 직접 활용해 볼 경우는 거의 없을 법한 정보를 전해 주셨다.

“여보. 돌아가셨어. 돌아가신거야. 이제 그만 일어나요.”

아버지가 세곡동 주택을 재건축하면서 각 방 마다 자랑스럽게 설치한 LED 전등은 눈이 따가울 정도로 쨍하게 켜져 있고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사위는 적막한데 내가 보고 있는 장면을 현실로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나는 윗집 동생에게 할머니의 별세를 알리며 얼른 내려오라는 전화와 119소방서에 가족 구성원의 사망 신고를 차례차례 수행했다. 2층 다른 이웃집에는 노부부가 살고 있는데 현직 요양병원 간호사로 근무하시는 노부인이 이 밤 중에 가운을 걸친 채 찾아와 할머니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돌아가신게 맞는 거 같다고 하셨다. 엄마의 죽음을 도저히 믿을 수 없고, 남편의 말은 대부분 흘려 듣고 있는 나의 엄마에게 전문적 식견을 지닌 제3자의 입을 빌려 상황을 타개하고자 한 아버지의 조치였다.

이윽고 동생이 방으로 들어왔다.

“언제 돌아가신거야?”

목소리에서 잠이 조금 묻어 나왔다.

“얼마 안 된 거 같아. 엄마가 할머니가 너무 조용하시길래 잘 주무시는지 확인하러 왔다가 알았나 봐.”

내 입으로 직접 이 사실을 표현하자니 불가역적인 선언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동생도 말 없이 훌쩍거렸다.

15분 정도 지나자 긴급출동한 소방대원들이 환자 운반대와 심장제세동기를 짊어지고 들이닥쳤다. 소방관은 상황을 파악하더니 할머니가 정말 사망한건지 판별하기 위해 기기를 연결해 생체신호를 측정했다. 영화에서 환자의 임종을 보여주는 클리셰인 위 아래로 미약하게 흔들리던 그래프가 심정지 발생 후 삐이- 소리와 함께 완전한 직선으로 그어지는 모습과는 달리 평평한 그래프 중간에 가끔씩 미세한 떨림 같은 신호가 기록되었다. 결과를 보여준 소방관은 나의 의문을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사망한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에게서 보통 발견되는 패턴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자동심장충격기로 심폐소생을 시도해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원치 않는다고 했다.

소방대원들이 현장을 정리하고 떠날 무렵 대왕파출소에서 경찰관 두 명이 찾아왔다. 소방서에 사망 신고가 접수되면서 자동으로 관할 파출소에도 전파가 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엄마가 경찰관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낯선 손님들이 드나들며 어수선한 가운데 새로운 사람 셋이 나타나 부모님 집 현관문 사진을 찍고 있었다.

“누구시죠? 지금 뭐하시는 건가요?”

내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아, 예 실례합니다. 현장 기록을 위해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이쪽의 청도 기다기지 않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복장을 보니 ‘KPSI 경찰과학수사’ 라는 표식이 적힌 조끼를 입고 있었다. 할머니가 계신 장소를 묻고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우왕좌왕하는 가족들을 내보내고 채증을 마친 후 바로 물러갔다.

소방관 다음으로 찾아온 경찰관들은 사실 관계 정도를 확인하고 출동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조의를 남기고 파출소로 복귀하려는 찰나 또 다른 사람들이 도착했다.

서울 강남경찰서에서 나온 형사 2인조이었다. 선입견에서 비롯했겠지만, 인근 파출소 경찰관이 안정감을 주는 제복의 상냥한 얼굴들로 다가왔다면, 지역 경찰서에서 ‘사망 사건’을 수사하러 온 형사들은 사복 차림에 다소 무뚝뚝하고 거친 인상이었다.

아무튼 오늘밤 얼마나 다양한 공무원들을 더 상대해야 하는건지 나로서는 피곤할 지경이었다. 인명이 관련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나라의 사고 처리 체계가 외관상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편이구나 실감할 수는 있었다. 형사들은 병약한 중환자가 왜 병원 대신 자택에 머물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이상하게 여기며 질문을 던졌다. 우호적인 태도로 경청하던 경찰관과는 달리 직업적으로 궁금한 부분에 대해 우리가 명료하게 해명해주기를 기대하는 형사의 말투였다.

엄마는 슬기롭게도 지난 2년여 시간 동안 입퇴원 내역, 투약 목록, 진료비 등 할머니의 투병 일지를 남몰래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증거의 효력을 지니게 된 메모와 함께 제시된 엄마의 진술은 추가적인 심문 없이 상황을 깔끔하게 종료해서 거실 테이블에 둘러 앉은 사람들의 긴장을 잠시나마 풀어주었다. 평소 쓸데없는 내용을 따지기 좋아하고 사소한 것들을 기록한다고 나와 동생의 지속적인 핀잔을 받던 엄마였는데 39년 공무원 생활의 관록은 무시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엄마를 제외한 이밤의 모든 공직자들은 정해진 순서대로 업무를 마치고 떠나갔고 우리 가족은 할머니를 어디에 모실지 논의했다. 나와 동생은 세곡동 집에서도 가장 가깝고 할머니가 오래 입원했던 삼성서울병원을 주장했다. 아버지는 할머니 생전부터 서울의료원 강남분원에서 장례를 치를 계획이 다 있었다. 그쪽에 지인을 통해서 담당자 연락처도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나는 사랑하는 가족이 아직 살아 있는데 장례식장을 미리 알아보고 준비한 아버지가 처음엔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장례를 모두 마치고 다시 생각해보니 나처럼 감상에 젖어 대책 없이 손 놓고 있다 일이 닥치고 나서 생각하기에 초상은 매우 중요하고 큰 가족행사였다. 아버지가 현명하고 옳았다. 엄마는 구급차에 실려 간 할머니를 수술을 통해 생명을 살려놓은 삼성병원의 공로는 인정하지만 집도의가 수술 부위를 매끄럽게 봉합하지 못한 탓에 수술후유증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고생하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삼성병원을 마뜩찮고 괘씸하게 여기셨다. 뾰족히 다른 대안이 없는 우리 가족은 삼성동의 서울의료원 강남분원 장례식장에 연락했다.

장례식장 담당자는 새벽 2시가 갓 넘은 시간에도 용케 집에서 빈소까지 시신을 운송할 차량을 수배하여 보내왔다.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체구가 작은 중노인이 승합차에서 들 것을 챙겨 나타났다. 가장 먼저 할머니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사용하지 않은 깨끗한 흰 천을 펼쳐 몸을 덮었다. 혹시나 이동 중에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목, 손목, 발목 부위를 별도의 천으로 몸과 하나로 묶었다. 나와 동생이 중노인을 도와 지하 주차장에 정차 중인 승합차 스타렉스에 할머니를 옮겨 태웠다. 스타렉스는 운전석과 조수석 뒤로는 좌석 대신 사람을 똑바로 눕혀 고정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개조되어 있었다. 조수석과 간이석 두 자리에 아버지와 내가 동승해서 장례식장으로 먼저 출발했고, 엄마와 아내, 동생 부부는 옷가지를 포함해 빈소에서 지낼 때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 오기로 했다. 토요일 스산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고요한 강남구 탄천동로를 달리는 승합차 간이석 위에서 나는 오늘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기억하리라 다짐했다. 조수석에서 아버지는 내가 신중하게 골라 입은 회색 울 바지를 만져 보시며 이거 너무 추운거 아니냐 괜한 걱정을 해주셨다.

할머니를 태운 승합차는 침묵같이 껌껌한 장례식장에 천천히 들어서 영안실 앞에 멈춰섰다. 입구에는 아버지와 통화를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담당자가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 역시 우선 할머니께 허리 굽혀 인사하며 고인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 담당자가 할머니를 영안실에 안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아버지와 함께 사무실로 이동해서 엄마와 남은 가족을 기다렸다. 장례 절차는 엄마가 가입한 공무원 상조회를 통해서 진행하기로 했다. 우리 가족은 다시 상조회 소속 장의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새벽 4시쯤 되었을까 아담한 키에 수염이 많이 나 면도를 했음에도 가뭇한 턱과 뺨, 장의사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상당히 높은 음정의 명랑한 목소리를 지닌 남자가 장례식장 사무실에 총총 걸음으로 들어 왔다. 외모와 음성이 2018년까지 같이 일했던 전 직장 동료와 너무 비슷해서 어떻게든 관계된 친척이 아닐까 문득 궁금해 졌다. 장의사는 상주이자 상조회원인 엄마와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자리에 멈춰 서서 진심이 담긴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우리 가족과 장례식장 직원, 장의사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장례 기간, 빈소의 규모, 종교에 따른 장례 형식, 장사 방법과 같이 매우 실무적이고 민감할 수 있는 내용을 하나씩 정해나갔다.

일단 장례식장에서 고인을 받아들여 정식으로 장례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의사의 공인된 사망 진단서가 필요했다. 발인 후 화장터에서, 그리고 유가족이 공공기관에 최종적으로 사망 신고를 할 때도 제출해야 한다. 우리 할머니는 병원에서 숨을 거두신 게 아니라 집에서 주무시다가 하늘로 가셨기 때문에 사체검안서를 작성해 줄 전문 의료인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아침 6시가 넘어 날이 밝아 올 무렵 장례식장 사무실과 협약을 맺어 고정적으로 진단서를 발급해주는 의사가 나타났다. 편한 캐쥬얼 복장의 오십대로 보이는 노련한 의사 선생은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호출된 게 못마땅한지 후닥닥 해치우려는 기세였다. 어떤 인사도 없었다.

사인은 노환으로 인한 병사.

이의는 없었지만 30분도 들이지 않은 전문가의 효율적인 진단과 이에 대한 즉각적인 수수료 수령은 매우 행정적으로 느껴졌고 약간의 부당한 적개심 마저 들었다.

우리 가족은 삼일장을 지낼 볕 잘드는 2층의 특실 1호로 인도되었다. 하룻밤새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유형의 다양한 사람들을 빼곡하게 겪었고, 나는 너무 피로했다. 빈소 옆 가족 휴게실 바닥에 누워 동생과 잠시 쪽잠을 청했다. 40분쯤 눈을 붙였을까 장례식장 사무실에서 고인의 영정으로 사용할 사진이 혹시 따로 있는지 물어왔다. 할머니는 육체적으로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10년은 더 살아갈 것처럼 정정했고, 투병한 2년의 기간 동안에는 잠시 바람 쐬러 외출 한 번 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히 쇠약해지셨다. 영정으로 내걸만한 초상을 준비할 겨를은 당연히 없었고, 5년 전 나의 결혼식 때 찍은 가족 사진에 담긴 할머니 모습을 포토샵으로 잘라내어 사용하기로 했다.

장례식장 매점에서 조문객을 대접할 때 필요한 물품들과 음식들을 하나 둘 올려 보냈고, 빈소에는 흰 국화와 기독교식 장례를 알리는 십자가, 한 시간 만에 준비된 할머니 영정 액자가 놓였다. 외삼촌과 이모 네 분, 십여 명의 이종사촌 가족들이 장례식장에 속속 도착했다. 어떤 이모부는 거의 십오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만나는 셈이었다. 그 이모부님의 지인 조문객은 합쳐 다섯 명도 채 안되었을 거라 추측하지만,

“이렇게 찾아주셔서… 저어엉말 감사합니다.”

장례기간 내내 모든 손님에게 매번 울컥 인사하는 모습이 친척 일가와 절연했던 그동안의 세월을 사과하려는 송구스러운 마음에서였는지 약주를 드시면 원래 감상에 쉽게 젖는 분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모습이었든 우리는 이제 외할머니를, 어머니를, 장모를, 외증조모를 우리 곁에서 떠나 보내드릴 준비가 되었다.

사흘에 걸쳐 입관, 발인, 화장, 납골묘 안장을 지내며 나는 가슴이 시리도록 많이 울었고, 친지들이 저마다 다르게 기억하는 할머니의 생전 시절을 떠올리며 더욱 입체적으로 재구성되는 할머니의 모습에 가슴 따뜻하게 뭉글해지기도 했다. 나는 외조모상이라 주변에 짐짓 부음을 전하지 않았음에도 주말에 어려운 시간을 내어 찾아와 준 소중한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에게 큰 위로와 은의를 입었다.

이점이, ‘점의 그녀’.

잘고 걸은 사랑을 함께 나누다 우리 기억에 또렷한 점 하나 남기고 91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가다.

이후 나와 아내는 세곡동을 떠나 연희동에 보금자리를 잡았고, 이제, 도이라는 딸 둘을 얻어 벅찬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쌍둥이가 우리를 찾아온 시점을 거슬러 따져 보면 외할머니가 하늘로 가시고 일주일 즈음 된다.